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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09월0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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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학교소개 >인성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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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성학교 개교 |
| 인성학교(仁成學校)는1916년 가을 상해 교회를 중심으로 여운형(呂運亨), 선우혁(鮮于爀), 한진교(韓鎭敎), 김철(金澈) 등이 교민들의 교육을 담당할 교육기관을 설립할 것을 결의, 학생 4명으로 "상해기독교소학교(上海基督敎小學校)"를 개교하였는데 이것이 인성학교(仁成學校)의 전신(前身)이다. 이듬해 1917년 2월 공동조계(共同租界) 곤명로(昆明路) 대복리(戴福里) 75號에서 학교명(校名)을 인성학교(仁成學校)로 개명(改名), 정식으로 교민(僑民)들의 초등교육기관으로 출범하였다. |
| ☞ 개교 초 학교운영 |
| 초대 학교장 여운형(呂運亨)은 학교설립 후, 기본재산도 없고 뚜렷한 수입원도 없어 경영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918년 10월에는 공동조계지(共同租界地) 사천로(四川路)에 위치한 명강중학교(明强中學校) 내로 이전 겨우 명맥을 유지해 왔으나 재정의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여 학교 경영권을 1919년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으로 소속을 이관시켰지만, 재정의 압박은 여전히 가중되어 1919년 9월 28일 불란서조계(佛蘭西租界) 하비로(霞飛路) 강녕리(康寧里)로 옮겼다가 다시 조계지(租界地)내 여러 지역으로 옮겨다니게 되었다. 상해 교민단에서는 학교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상해 거주 교민들로부터 기부금을 요청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1920년 대한인거류민단(大韓人居留民團, 團長 呂運亨) 내부에 교육과(敎育科)를 두어 직접 학교 행정을 관할하기도 했고, 학무위원회(學務委員會)를 두어 경영의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학교재정(學校財政)의 어려움이 날로 심하여 유지비를 줄이기 위해 민단사무소(佛租界 康寧里2號) 위층을 개조하여 교사(校舍)로 사용하였다.상해교회(上海敎會)도 인성학교 유지회(維持會 회원: 崔昌植, 鮮于赫, 韓鎭敎, 呂運亨, 李光洙, 金泰淵, 金淳愛, 趙基千)를 구성하고, 특별찬조자로 이동휘(李東輝), 이동녕(李東寧), 이시영, 안창호(安昌浩), 신규식(申圭植), 남형우(南亨祐), 손정도(孫貞道)를 선임하여 인성학교를 후원하였다. |
| ☞ 교사 신축 추진 |
| 민단장(民團長) 여운형(呂運亨)이 학교장(學校長)을 겸임하여 오다가 김태연(金泰淵), 손정도(孫貞道)에게 잠시 교장을 맡긴 후, 1920년 여름 미국에서 돌아온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呂運弘)을 교장으로 선임하였다. 그는 취임과 동시에 학교 육성책을 제시하면서 먼저 학교 교사(校舍) 신축계획을 발표하게 된다. 교사 신축에 필요한 2만5천元의 기금을 모금하기로 하고 동 금액의 半은 교민들로부터 모금하고 나머지 半은 재미(在美)교포들에게 모금하기로 계획하였다. 상해 교민단에서는 학무회의를 소집하여 김두봉(金枓奉)을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교육비에 대한 관심고조와 교사신축비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학교와 민단간의 합심단결로 빠른 시일 내에 교사 신축을 강행할 것을 결의하는 등 적극적인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여운홍 교장이 재미교포들에게 인성학교 교사 신축기금 모금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교민들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학교 경영난이 점점 어려워져감에 따라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1923년 8월 25일 민단장 이유필(李裕弼)이 교장을 겸하고 민단학무위원회조례(民團學務委員會條例)를 제정하여 학교 운영 경비 모금에 노력한 결과, 1924년 1월 동아일보사에서 1,144元을 후원하게 되어 이중 1,000元은 숙원사업인 교사 신축비로 예치해두고 나머지 144元은 학교운영비로 충당하여 학교 경영이 호전되었다.상해에 거주하는 교민들의 교육열이 점점 높아짐에 따라 학교를 전담하는 학교장을 민단장으로부터 분리하자는 요망이 있어 민단장과는 별도로 조상섭(趙尙燮)을 인성학교장으로 임명하였다.조상섭 교장은 부임하던 해에 교사(校舍)를 건축키로 계획하고 1萬元의 예산을 책정하였다. 학교장을 중심으로 교사, 학생들이 한마음이 되어 예산절감 운동과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이러한 학교의 노력에 교민들의 호응도가 높아져 재학생이 50명으로 늘어났고 그와 동시에 졸업생 총수도 100여명이나 되었다.그러나 사용하고 있던 辣裵德路 友記里 2號에 있는 교사는 너무 협소하여 늘어난학생들을 전부 수용하기에 부족하고 당시까지 비축한 금액으로는 교사를 신축할 수도 없는 형편이라 白來尼蒙馬浪路(현재 馬當路) 協盛里 1號로 이전하여 폐교할 때까지 이 건물을 사용하였다. 새로 이전한 건물도 넉넉지 못하여 1924년 1월 7일 교사확장 기금마련 겸 교민 친선도모를 위한 신년음악회를 개최하기도 했다(장소: 民國路소재 浸禮會堂, 참가자: 500여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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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성학교 폐교 EFF3FF |
| 인성학교는 마당로(馬當路) 교사(校舍)에서 민족의 요람으로서 임시정부산하의 유일한 공립학교로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해 왔으나, 1935년 11월 10일 재상해 일본총영사관(在上海 日本總領事館)에서 일본 국정교과서에 의한 일본어교육을 실시할 것을 강압적으로 명령하기에 이르자 선우혁(鮮于爀) 교장이 이 명령에 불복하고 무기한 휴학을 선언해 사실상 폐교되었다. 폐교 후에도 유치원생 20여명은 상해한인교회 소속 유치원으로 이관, 별도 유치원으로서 계속 운영되었다. 그후 한국인 자녀들은 부득이 일본계, 중국계, 선교사 등의 외국인이 운영하는 학교에 취학하게 되었다. 일본이 전쟁에서 항복하자 선우혁(鮮于爀)은 교회 인사들과 함께 1946년도 虹口區 虹江支路 吉祥里 212弄 상해한국인기독교회 내에 仁成학교를 다시 개교하였으나 조선어로 교육함에 따라 학생수가 점점 줄어들어 1981년 2월에는 학생수가 4명으로 줄어들자 부득이 폐쇄하게 되었다. |
| ☞ 인성학교 교육 방침 |
| 민족교육을 통하여 민족정신과 민족역량을 배양하여 자활능력(自活能力)을 키우고 완전한 민주시민으로 양성하여 궁극적으로는 신 민주국가를 수립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상해교민단 의사회(上海僑民團 議事會)에서 결정한 인성학교 규칙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초등교육의 의무화와 학령이 지난 아동도 인성학교에 입학시킬 것을 권유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인재 양성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
| ☞ 교과 내용 |
| 민족의식 고취라는 교육방침에 따라 교과목에 한국어, 한국사, 역사(세계사) 등에 치중하였고, 일본어는 배우지 못하게 하였다. 그후 교과목을 늘려 국어, 역사, 본국지리, 한문, 산술, 이과(理科), 수공(手工) 외에 3∼4학년에는 중국어와 영어가 추가되었다.그러나 인성학교 졸업생이 중국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교과목을 가르치지 못하는 실정이었고, 또한 본국에서 오는 유학생이 날로 증가되어 1923년부터 학교 내에 보습과(補習科)를 설치 운영함과 동시에 인성학교를 임시정부 산하에 두어(私立에서 公立학교로 위상이 변경) 모든 학교운영을 민국의사회(民國議事會)에서 결정하게 되었다.1924년부터는 학교 내 예비강습소를 설치하고 최고의 교사진을 구성하였다. 영어에는 김규식(金奎植), 여운형(呂運亨), 현정건(玄鼎建), 수학 및 산술에는 최창식(崔昌植), 서병호(徐丙浩), 중국어에는 김문숙(金文淑), 국어 및 역사에는 김두봉(金枓奉) 등의 유명한 독립운동가들이 교사진으로 채용되었다. |
| ☞ 학생 현황 |
| 학생들은 대부분 독립운동가 자녀들(안중근의 조카, 권진오의 자제, 김규식의 자제 등)이지만 해방 후 남북이 분단된 후에는 북으로 간 학생들도 다소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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