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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한국학교의 전신 '인성학교'의 유래

인성학교 개교


인성학교(仁成學校)는 1916년 가을 상해 교회를 중심으로 여운형, 선우혁, 한진교, 김철 등이 교민들을 위한 교육을 담당할 교육기관을 설립할 것을 결의하여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학생 4명으로 ‘상해기독교소학교(小學校)’를 개교하였는데 이것이 인성학교의 전신(前身)이다. 이듬해 1917년 2월 ‘공동조계지(共同租界地) 곤명로(昆明路) 대복리(戴福里) 75호(號)’에서 학교명을 인성학교로 개명(改名), 정식으로 교민들의 초등교육기관으로 출범하였다.

개교 초 학교운영


초대 학교장 여운형은 학교설립 후, 기본재산과 뚜렷한 수입원이 없어 경영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918년 10월에는 ‘공동조계지 사천로(四川路)’에 위치한 명강중학교(明强中學校) 내로 이전 겨우 명맥을 유지해 왔으나 재정의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학교 경영권을 1919년 대한교민단으로 소속을 이관시켰다. 그러나 재정의 압박은 여전히 가중되어 1919년 9월 28일 ‘불란서조계지 하비로(霞飛路) 강녕리(康寧里)’로 옮겼다가 다시 조계지내 여러 지역으로 옮겨 다니게 되었다. 상해교민단에서는 학교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상해 거주 교민들로부터 기부금을 요청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20년 대한인거류민단 내부에 교육과를 두어 직접 학교 행정을 관할하기도 했고, 학무위원회를 두어 경영의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학교재정의 어려움이 날로 심하여 유지비를 줄이기 위해 민단사무소 위층을 개조하여 교사(校舍, 학교의 건물)로 사용하였다. 상해교회도 ‘인성학교유지회’를 구성하고, 특별찬조자로 이동휘, 이동녕, 이시영, 안창호, 신규식, 남형우, 손정도 등을 선임하여 인성학교를 후원하였다.

인성학교 교육 방침


민족교육을 통하여 민족정신과 민족역량을 배양하여 자활능력을 키우고 완전한 민주시민으로 양성하여 궁극적으로는 신 민주국가를 수립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상해교민단 의사회에서 결성한 인성학교 규칙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초등교육의 의무화를 학령이 지난 아동도 인성학교에 입학할 것을 권유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인재 양성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교과내용


교육방침인 ‘민족의식 고취’에 따라 교과목에 한국어, 한국사, 역사(세계사) 등에 치중하여 교육하였고, 일본어는 배우지 못하게 하였다. 그 후 교과목을 늘려 국어, 역사, 본국지리, 한문, 산술, 이과(理科), 수공(手工) 이외 3~4학년에는 중국어와 영어가 추가되었다. 그러나 인성학교 졸업생이 중국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교과목을 가르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또한 본국에서 오는 유학생이 날로 증가되어 1923년부터 학교 내에 보습과를 설치 운영함과 동시에 인성학교를 임시정부 산하에 두어 모든 학교운영을 민국의사회에서 결정하게 되었다. 1924년부터 학교 내 예비강습소를 설치하고 최고의 교사진을 구성하였다. 영어에는 김규식, 여운형, 현정건, 수학 및 산술에는 최창식, 서병호, 중국어에는 김문숙, 국어 및 역사에는 김두봉 등의 유명한 독립운동가들이 교사진으로 채용되었다.

학생현황


학생들은 대부분 독립운동가 자녀들(안중근의 조카, 권진오의 자제, 김규식의 자제 등)이지만 해방 후 남북이 분단된 후에는 북으로 간 학생들도 다소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